신라 최초의 국사, 거칠부는 왜 ‘역사책’을 썼을까?
– 진흥왕 시대, 기록을 통해 국가를 만들다
“기록하지 않는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국가의 역사는 단순한 과거의 연대기가 아니라, 국민의 정체성과 자부심을 형성하는 근간이 되기 때문입니다.
삼국시대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백제, 고구려, 신라 삼국은 모두 각자의 문화와 전통을 갖고 있었지만, 그중 가장 먼저 ‘국가의 역사’를 의도적으로 정리하고 기록한 나라는 바로 신라입니다.
그 중심에는 진흥왕과 그의 신하 거칠부가 있습니다. 오늘은 많은 사람들이 잘 모르는 ‘신라 최초의 국사 편찬’ 이야기, 그리고 그 의미에 대해 깊이 들여다보려 합니다.
📌 거칠부, 그는 누구였나?
거칠부(居柒夫)는 6세기 신라 진흥왕 시기 활약한 대표적인 정치가이자 문신(文臣)입니다.
그는 진흥왕의 정치적 후원을 받으며 법률, 외교, 문화 등 다양한 영역에서 개혁을 주도했습니다. 특히 문자와 기록의 중요성을 일찍이 인식했던 인물로 알려져 있죠.
그의 가장 위대한 업적 중 하나가 바로, 신라 최초의 국사(國史) 편찬입니다. 이 국사는 단순한 역사책이 아니라, 신라의 뿌리와 정체성을 스스로 정리한 기록으로, 국가의 정통성과 자존심을 세우는 작업이었습니다.
📖 국사 편찬, 그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6세기 중반, 신라는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진흥왕은 화랑도를 정비하고, 한강 유역과 함경도 지역까지 영토를 넓히며 삼국 중 가장 적극적으로 영토 확장에 나선 왕이었습니다.
하지만 신라는 아직까지 자신의 역사나 정체성을 명확히 규정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당시 고구려는 광개토대왕릉비 같은 비문을 통해 자신들의 업적을 기록하고 있었고, 백제 역시 왕실 계보를 정리한 문서들이 존재했지만, 신라는 내부 기록이 부족했습니다.
이 시점에서 진흥왕은 국가 정체성을 확립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역사 편찬의 필요성을 느꼈고, 이를 수행할 적임자로 거칠부를 선택한 것입니다.
🧾 거칠부의 ‘국사’란 어떤 책이었을까?
안타깝게도 거칠부가 편찬한 국사는 현재까지 전해지지 않습니다. 실물이나 구체적인 내용은 사라졌지만,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등의 후대 문헌을 통해 그 존재는 확실하게 입증됩니다.
이 국사는 다음과 같은 성격을 지닌 것으로 추정됩니다:
- 신라 건국 신화와 왕실 계보
→ 박혁거세부터 진흥왕까지의 왕통을 정리 - 주요 전쟁, 외교, 정복 활동
→ 신라의 외교 및 군사 성과를 강조 - 국가 법제 및 제도의 정리
→ 정치 체계, 관직, 율령 제도의 정비 상황 기록
이는 단순한 ‘사건의 나열’이 아니라, 신라를 하나의 ‘국가’로 정의하고 정당성을 부여하는 서사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왕권 강화와 민심 통합, 외부 국가와의 외교에서 이 같은 역사 서술은 큰 무기였던 것이죠.
🔍 왜 지금은 이 국사가 전해지지 않을까?
거칠부의 국사가 사라진 이유는 여러 가지로 추정됩니다.
- 문자의 제한: 당시에는 아직 한자가 완전하게 통용되지 않았고, 문자 기록의 보존력이 약했습니다.
- 전쟁과 소실: 신라는 이후 왜구의 침입, 고려 초기 내전 등을 거치면서 많은 문서들이 소실되었습니다.
- 불교 중심 문화의 영향: 진흥왕 이후 신라는 불교문화에 집중하며 기록보다는 구술·설법 중심으로 흐르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라짐은 거칠부의 업적을 무시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의 국사 편찬은 한민족 역사 기록의 시작점이자, 국가 스스로 자신의 이야기를 쓰기 시작한 첫걸음이었습니다.
🧠 우리가 주목해야 할 ‘국사 편찬’의 의미
1. 자의식의 표현
거칠부의 국사는 단지 정보를 정리한 것이 아니라, 신라가 자신의 존재 이유와 정통성을 스스로 구성해 나간 상징적인 사건입니다.
2. 국가 통합의 수단
역사는 단결의 도구입니다. 거칠부의 국사는 왕권을 중심으로 귀족과 백성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공통의 서사를 제공했습니다.
3. 정치적 정당성 확보
국경 밖으로 진출하고 다른 나라와 외교·전쟁을 할 때, ‘우리의 뿌리는 이렇다’고 말할 수 있는 문서적 근거는 매우 중요했습니다. 이는 신라의 외교력 강화에도 크게 작용했을 것입니다.
💡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
현대 사회에서도 역사 기록은 단지 과거를 돌아보는 일이 아닙니다.
어떤 사건을 어떻게 해석하고, 누구의 시선에서 기록하느냐에 따라 집단의 정체성과 미래에 대한 방향성이 달라지기 때문이죠.
거칠부의 국사 편찬은 우리가 지금 “역사를 어떻게 쓰고, 보존해야 할지”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사건입니다.
우리는 과거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통해 오늘의 우리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 맺으며 – 조용한 개혁의 시작, 거칠부의 기록
거칠부는 장군도, 왕도 아니었습니다. 칼 대신 붓을 들었고, 전장 대신 역사서를 펼쳤습니다.
하지만 그가 만들어낸 기록은 수많은 전쟁보다 더 강한 유산을 남겼습니다.
그의 국사는 지금 존재하지 않지만, 그 **‘기록하려 했던 의지’와 ‘자신을 돌아본 정신’**은 지금도 우리에게 귀중한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