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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의 승리를 현실로 만든 고려의 전략

외교의 승리를 현실로 만든 고려의 전략

 

서희의 담판 이후, 강동 6주의 설치와 방비 체계

 

고려사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 중 하나는 단연 993년, 거란 1차 침입 당시 벌어진 서희의 외교담판입니다.
“칼 한 번 쓰지 않고 넓은 땅을 얻었다”는 이 사건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 뒤이은 고려의 실질적인 통치 행위, 즉 강동 6주의 설치와 방어 체계 구축 과정은 상대적으로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서희의 담판 이후 고려가 어떻게 강동 6주를 실제 영토로 편입했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나타난 정치적, 행정적, 군사적 준비를 조명해보고자 합니다.

 

외교의 승리를 현실로 만든 고려의 전략

 


서희의 외교, 그 이상의 의미

 

993년, 거란의 소손녕이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합니다. 당시 고려는 고구려의 후계 국가임을 자처하며 북진정책을 펼치고 있었고, 거란은 이를 견제하기 위해 압박에 나선 것입니다.

이때 고려는 군사적으로 불리한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외교 문신 서희를 협상 대표로 파견했습니다.
서희는 담판에서 고려가 고구려의 계승국임을 주장하며, 압록강 동쪽의 강동 6주는 본래 고려 땅임을 논리적으로 설명합니다.
거란도 송나라를 경계하는 상황이었기에, 불필요한 전면전을 피하고 서희의 요구를 수용, 강동 6주를 할양하게 됩니다.

하지만 실제 문제는 그 다음이었습니다.

 

 


강동 6주란 어디인가?

 

‘강동 6주’는 압록강 동쪽, 지금의 함경남도 일부와 평안북도 지역에 해당하는 6개의 행정 구역을 말합니다.
정확한 지역에는 논란이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다음과 같은 지역으로 추정됩니다.

  • 영주(永州)
  • 철주(鐵州)
  • 정주(定州)
  • 혜주(嵇州)
  • 곡주(谷州)
  • 성주(城州)

이 지역은 전략적 요충지로, 압록강 연안의 방어선을 형성하는 동시에, 고려의 북방 세력 확장에도 중요한 교두보 역할을 했습니다.

 

 


고려의 행정적 조치 – 강동 6주 설치의 실제

 

서희가 땅을 얻어온 것만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고려 조정은 이 땅을 실질적으로 통치하기 위한 행정적 조치를 단행합니다.

  1. 지방관 파견
    새로 편입된 강동 6주에는 지방관을 임명하여 중앙의 권위를 이식합니다. 이는 곧 고려의 법과 제도가 이 지역에도 적용됨을 의미합니다.
  2. 성곽 축조 및 도로 정비
    적의 재침입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각 주(州)에 성을 쌓고 방어선을 구축했습니다. 동시에 중앙과의 연결을 위한 통로, 마방(말 교환소) 등 교통 기반시설도 정비됩니다.
  3. 이주 정책과 토지 재분배
    고려는 이 지역에 중앙 및 서북 지방 주민들을 이주시키고, 토지를 재분배하여 새로운 정착민들을 유입합니다. 이는 경제 활성화와 국방력 강화를 동시에 노린 전략이었습니다.
  4. 호적 및 조세 체계 구축
    새로 편입된 지역에 호적을 작성하고, 군역과 조세를 부과하는 체계를 신속히 적용했습니다. 이는 곧 이 지역을 단순한 완충 지대가 아닌 실질 영토로 편입하려는 국가 의지를 보여줍니다.

 


군사적 대비: 국경 방어의 시작

 

거란이 물러났다고 해서 위협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고려는 강동 6주에 다음과 같은 방어 시스템을 설치합니다.

  • 변방군 진배치
    각 주에 병력을 주둔시키고, 외적의 동향을 감시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 성곽 중심의 방어 체계
    고구려의 전통을 계승한 고려는, 각 주에 토성과 석성을 축조하고 성내에 병영과 창고, 관청을 두어 군사 및 행정이 동시에 이루어지게 했습니다.
  • 보병·기병 운용
    국경 지역은 험준한 산악과 강이 많았기 때문에, 기동력이 뛰어난 기병과 지형에 익숙한 보병이 병행 운용되도록 배치되었습니다.

 


외교가 군사로, 외교가 현실로

 

강동 6주 설치는 단순한 외교적 결과물이 아닙니다.
서희의 담판은 씨앗이었고, 고려 조정과 백성의 합심은 그것을 실현시키는 뿌리와 가지였습니다.

서희의 설득으로 거란이 물러간 후, 고려는 그 지역을 단순히 ‘받기만 한 땅’이 아닌 ‘자신의 땅으로 만드는 실천’을 했습니다.
이 과정은 오늘날 국제 외교에서 영토 분쟁 해결 이후의 후속 조치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역사적 사례이기도 합니다.

 

 


강동 6주가 남긴 유산

 

  • 북방 영토 확장의 기틀
    강동 6주 확보는 이후 윤관의 여진 정벌(1107년), 북방 개발의 발판이 됩니다.
  • 중앙집권 강화의 사례
    변방 지역에도 고려의 행정력이 작동함을 보여주며, 국가 전체의 일원화된 통치 기반을 마련합니다.
  • 전쟁 없는 확장의 모델
    칼 없이도 국토를 넓힐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하며, 후대 외교의 모범으로 남게 됩니다.

 


마무리하며

 

‘서희의 담판’은 단지 언변의 승리만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 뒤를 이은 고려의 실천, 특히 강동 6주를 국가 시스템 안으로 끌어들이고 국방 체계를 정비한 과정
외교와 행정, 군사가 맞물린 입체적 국력 운용의 사례였습니다.

오늘날 외교는 협상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 결과를 어떻게 관리하고 지속시킬 것인가가 더 중요합니다.
천 년 전 고려가 보여준 강동 6주의 운영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국가 경영의 교훈을 던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