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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치안유지법, 조선공산당 결성, 조선사편수회 설치

 

1925년 치안유지법, 조선공산당 결성, 조선사편수회 설치 — 식민통치의 고도화와 민중의 조직화

 

블로그 제목: 해당 년도에 일어난 대한민국의 역사적 상황과 위기, 극복, 서사 │ 핵심 메시지/테마: 수많은 시련을 이겨낸 대한민국의 역사적 사실 관계 │ 타겟: 한국사에 관심은 있지만 깊이는 부족한 20~40대 │ 톤앤매너: 절제된 감정, 명료한 정보 전달

1925년은 일제가 3·1운동 이후 ‘문화통치’의 외피를 두른 채, 실질적으로는 사상과 조직을 정조준하며 통치를 고도화한 해였다. 일본과 식민 당국은 치안유지법을 통해 사상과 결사를 전면 규제했고, 같은 해 조선총독부는 조선사편수회를 설치해 우리 역사를 ‘식민지 논리’에 맞게 재편하려 했다. 한편 국내 진보·민족 진영은 조선공산당의 결성을 통해 노동·청년·농민 조직을 엮어 반식민 네트워크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국가 폭력과 민중 조직화가 정면으로 맞부딪힌 분기점, 그것이 1925년이었다.

 

1925년 치안유지법, 조선공산당 결성, 조선사편수회 설치

 

일제강점기: 법·학술·치안이 결박한 해, 1925

 

1925년 치안유지법은 ‘국체(황실) 변혁’과 ‘사유재산제 부인’을 금하는 조항으로, 독립운동은 물론 노동·농민 운동, 학생 자치 활동까지 포괄적으로 처벌할 수 있게 만들었다. 법률이 ‘사상’을 죄로 만든 순간, 식민통치의 무게 중심은 총칼만이 아니라 법정과 감옥으로도 옮겨갔다. 그 결과 각지의 강연회·독서회·노동조합 결성은 상시 검거의 대상이 되었고, 정당 활동은 지하화되었다.

같은 해 조선총독부는 조선사편수회를 설치했다. 목표는 분명했다. 고대에서 근세까지의 조선사를 ‘자생적 발전이 없는 역사’로 줄줄이 엮어, 일본의 식민 지배를 ‘문명 개입’으로 포장하는 것. 편찬·감수·용어 선택까지 총독부가 주도하며 사학의 기준을 틀어쥐자, 학교·언론·대중 교양물이 왜곡된 틀을 재생산했다. 역사를 바꾸면 현재의 저항도 흐려진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1925년의 통치는 총과 법전, 그리고 교과서로 완성되었다."

 

민중의 대응: 조선공산당과 ‘연결된 조직’의 출현

 

탄압이 거세질수록 조직은 더 단단해졌다. 1925년 조선공산당 결성은 단일 이념의 등장이 아니라, 노동조합·청년·농민으로 이어지는 연결망의 구축이었다. 경성·인천·원산의 노동 현장과 농촌의 소작 문제, 청년들의 야학과 독서회가 하나의 선으로 이어지며, 식민지 일상의 불합리를 ‘집합적 언어’로 바꾸는 시도가 본격화했다. 당국의 대대적 검거로 조직은 반복해 해산되었지만, 결사와 연대의 기술은 이후 신간회·농민조합·학생운동 등으로 확장되었다.

이 흐름의 배경에는 3·1운동 이후 전개된 각종 사회운동의 경험치가 있었다. 신문·잡지·강연을 매개로 지식과 노하우가 공유되었고, 변호사·교사·성직자 등 각계 인사들이 법률지원·자금·은신을 맡아 뒤를 받쳤다. 이름이 널리 알려지지 않은 이들의 기여가, 조직의 생존율을 끌어올렸다.

"진압은 조직을 해산시켰지만, 연결의 기술까지 없애지는 못했다."

 

도시와 재난: 을축년 대홍수, ‘인프라’의 민낯

 

1925년 여름 경성에 들이닥친 을축년 대홍수는 식민지 도시의 취약한 치수·위생·주거 구조를 드러냈다. 하천 범람으로 빈민가와 공장지대가 큰 피해를 입었고, 노동자 숙소·판자촌이 대거 유실되었다. 총독부는 복구를 명목으로 치수사업을 추진했지만, 실제로는 토지구획정리와 조세정책을 통해 원주민·서민의 주거를 도시 변두리로 밀어냈다. 재난은 자연의 문제가 아니라, 누가 보호받고 누가 밀려나는가를 가르는 사회적 선택임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이 재난은 도시 공중보건과 상수도, 하수·배수 체계의 중요성을 각인시켰다. 훗날 해방·전쟁을 거친 뒤 한국이 보건·치수·전력 같은 기반시설을 국가적 과제로 삼는 데에는, 이런 전간기의 ‘쓴 기억’이 배어 있다.

 

조선·고려·삼국으로 이어진 ‘사상과 서사의 전장’

 

사상을 통제하고 역사를 재편하려는 시도는 20세기만의 일이 아니다. 조선시대에도 붕당과 예송, 사문난적 논쟁처럼 사상 통제의 실험이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향약·서원·서당 같은 자치적 교육·토론의 전통이 존재해, 하향식 억압을 완충했다. 1925년 지하 독서회와 야학은 이 오래된 학습·토론의 생활성을 근대적으로 되살린 사례였다.

더 거슬러 고려는 불교·유교·도교가 공존하며 외세와의 대치 속에서도 사상과 서사의 유연함을 보였다. 삼국시대 고구려·백제·신라는 외교·전쟁의 서사를 스스로 기록·전파하며 정체성을 공고히 했다. 1925년 조선사편수회의 시도는 이 긴 역사적 서사권(敍事權)을 빼앗으려는 것이었고, 민중 조직화는 그 권리를 되찾기 위한 사회적 쓰기(writing)였다.

 

근현대의 연장선: 한강의 기적과 ‘네트워크 국가’

 

해방과 전쟁을 거쳐 한국은 산업화와 민주화를 모두 경험했다. 기업·노동·시민사회의 이해가 충돌하면서도, 위기 때마다 빠르게 결집하는 능력은 1920년대에 길러진 연결의 기술과 무관하지 않다. ‘한강의 기적’은 경제지표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조직·법·지식을 동원해 재난과 빈곤을 넘어선 사회적 학습의 결과였다. 1925년의 억압과 왜곡은 길게 보면, 오늘의 시민적 역량을 단련한 역설의 무대였다.

요컨대 1925년은 법으로 조이는 식민권력, 학술로 정당화하는 왜곡, 조직으로 응수하는 민중, 재난이 드러낸 구조적 취약이 한 화면에 겹쳐진 해였다. 그 충돌의 잔상은 지금도 우리 사회의 제도·담론·기억 속에 남아 있다.

"역사는 기억의 전장이다. 누가 쓰느냐가, 무엇이 남느냐를 결정한다."

 

교과서에 잘 나오지 않는 숨은 사람들

 

치안유지법 위반 사건 기록을 보면, ‘무직·학생·점원·인쇄공·간호원’ 같은 직업이 자주 등장한다. 지하 인쇄소를 꾸리던 식자공, 검거자 가족의 생계를 챙긴 여성 모임, 홍수 복구 현장에서 자발적으로 배식소를 운영한 청년들은 대개 이름 없이 지나간다. 그러나 바로 그 익명성의 층이야말로, 1925년 한국 사회의 지속 가능성을 지탱한 토대였다.

 

시간순 도표: 1925년 전후 주요 사건

연월 사건 핵심 내용
1919.03 3·1운동 전국적 항일 만세 시위, 대중운동의 분수령
1924 경성제국대학 설치 식민지 엘리트 양성·지식 통제의 제도화
1925.04 치안유지법 제정·시행 사상·결사 전면 통제, 독립·사회운동 일괄 탄압의 법적 기반
1925 상반기 조선공산당 결성 노동·청년·농민 조직 연계, 지하 활동 본격화
1925.06 조선사편수회 설치 총독부 주도의 역사 편찬으로 식민사관 체계화 시도
1925.07 을축년 경성 대홍수 도시 기반 취약성 노출, 하층민·노동자 거주지 큰 피해
1926.06 6·10 만세운동 학생·노동·사회단체 연대 시위, 1925년 조직화의 연장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