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건의 아들, 정종의 야망
평양 천도 시도와 고려 초기의 이상과 현실 (946년)
고려를 세운 왕건은 후삼국을 통일하고 개경(개성)을 수도로 삼아 새 왕조의 기틀을 닦았습니다. 그러나 통일 직후의 고려는 안정된 왕권 기반 위에 있던 것이 아니라, 여러 정치 세력의 이해관계가 얽힌 불안정한 상태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3대 왕 정종(靖宗)**은 **수도를 평양(서경)**으로 옮기려는 **‘천도 시도’**를 단행합니다.
그의 이 시도는 단순한 행정적 이전이 아니라, 이념과 정치적 정통성, 군사 전략, 종교적 이상이 어우러진 복합적 구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시도는 결국 실패로 끝났고, 고려는 개경 체제를 유지하게 됩니다.
이번 글에서는 정종의 천도 시도가 가지는 의미와 실패의 배경, 그리고 그 역사적 함의를 짚어봅니다.
고려의 수도, 왜 개경이었을까?
고려는 후삼국 통일 당시, **후고구려(태봉)의 수도였던 송악(개경)**을 계승하여 수도로 삼습니다.
개경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 왕건의 근거지이자 정치적 기반
- 백제·신라·고구려 세력 모두에게 중립적인 위치
- 교통의 중심지로서 상업과 행정에 유리
그러나 정종은 이러한 개경 중심 체제가 고려의 이상을 온전히 담지 못한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는 고구려의 계승자를 자처한 고려가 정통성을 상징할 만한 공간으로서 평양 천도를 시도하게 됩니다.
정종의 평양 천도, 왜 시도했는가?
1. 고구려 계승 이념 실현
고려는 국호 자체부터가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정종은 평양(고구려의 수도)를 중심으로 고려의 정통성을 확고히 하려는 시도를 했습니다.
- 평양은 고구려의 마지막 도읍지
- 백성의 인식 속에 “고구려=강한 나라”라는 상징 존재
- 통일 이후 고구려계 유민과 북방 세력의 민심을 얻기 위한 전략
2. 불교 이상 구현
정종은 신심이 깊은 불교 왕으로 평가됩니다.
그는 천도를 통해 불교 중심 이상 국가를 실현하려는 시도도 함께 구상했습니다.
- 평양에는 고구려 시기부터 이어진 불교 유산과 전통이 존재
- 천도와 함께 대규모 사찰 조성 계획을 세움
- 유학보다는 불교를 정치이념으로 삼으려는 의도
3. 북진 정책의 거점 마련
당시 고려는 발해 유민을 흡수하고, 여진·거란을 경계하는 북진 정책을 펼치고 있었습니다.
정종은 평양을 통해 군사적 전진 기지로서의 수도 기능을 기대했습니다.
왜 천도는 실패했는가?
정종의 의도는 야심 찬 구상이었지만, 여러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히며 무산되고 맙니다.
1. 귀족 세력의 강한 반대
개경은 왕건을 도운 문벌 귀족들의 근거지였습니다.
이들은 천도를 통해 자신들의 권력 기반이 흔들리는 것을 우려하며 강하게 반대했습니다.
- 귀족의 대토지와 자산이 개경에 집중
- 천도는 곧 기득권 분산을 의미
- 귀족 중심 정치 구조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
2. 행정·경제적 부담
당시 고려는 통일 이후 아직 국가 기반이 불안정한 상황이었습니다.
- 수도 이전에는 막대한 재정과 인력이 소요
- 평양 지역의 기반 시설 부족
- 국가 행정 체계의 혼란 우려
3. 정종의 정치적 기반 부족
정종은 왕건의 아들이지만, 그의 즉위는 다소 갑작스럽고 정치적 기반이 약한 편이었습니다.
그의 즉위를 지지한 세력 또한 제한적이었고, 천도라는 대규모 개혁을 이끌 동력이 부족했습니다.
정종의 의지는 실패했지만, 그 흔적은 남았다
비록 정종의 천도는 실현되지 않았지만, 그의 시도는 후대에 여러 영향을 남겼습니다.
- 서경(평양)의 위상 강화
- 고려는 이후에도 서경을 ‘부수도’ 개념으로 유지
- 숙종, 예종, 인종 등 일부 왕은 서경을 자주 행차하고 개발함
- 고려의 고구려 계승 의식 확산
- 천도 논의는 고려 전체에 ‘고구려의 부흥’이라는 상징을 각인
- 국경 방어, 북진 정책에도 정당성 부여
- 불교 중심 이상국가 구상의 전조
- 문종, 숙종 시기 불교국가 정책의 사상적 근거
정종의 천도 시도를 보는 오늘의 시선
정종의 천도 시도는 단순히 ‘실패한 시도’로만 보기에는 아쉬움이 큽니다.
그의 구상은 정통성과 이상, 안보와 전략, 종교와 행정이 결합된 국가 구상이었으며,
오늘날로 치면 **‘국가 개조 수준의 수도 전략’**이라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정종의 시도는 초기 고려가 단순한 세력 타협이 아닌, 사상과 철학을 통해 국가를 운영하려 했던 정황을 보여줍니다.
마무리하며 – 잊힌 왕, 다시 조명되다
정종은 단명한 군주였고, 그의 이름은 고려사에서도 그리 크지 않은 분량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수도를 바꾸겠다는 시도는 통치자 중에서도 가장 과감하고 선구적인 행보였습니다.
그는 실패했지만, 그가 남긴 시도는 후대의 수도 전략과 정치·사상적 흐름에 큰 자취를 남겼습니다.
우리가 그를 다시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그가 단지 ‘왕건의 아들’이 아니라,
새 시대의 구상을 실천하려 한 국가 건설자였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