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나라 사신과의 은밀한 밀약
이자겸의 외교 정치 음모, 고려 권력의 이면 (1115년)
고려 인종대(재위 1122~1146)는 겉으로는 태평한 시대처럼 보이지만, 그 내부는 끊임없는 권력 다툼과 외교적 긴장으로 뒤덮여 있었습니다.
그 중심에는 당대 최고 권신이자 왕실의 외척이었던 **이자겸(李資謙)**이 있었습니다.
그는 단순한 권력자가 아닌, 정치, 외교, 군사, 종교까지 손에 넣으려 했던 야심가였고,
그가 벌인 가장 대표적인 사건 중 하나가 바로 **금나라 사신과의 비밀 회유 사건(1115년)**입니다.
이 사건은 단순한 외교 협상 이상으로, 당대 고려 정치의 민낯을 드러낸 대표적인 사례이자,
왕권과 문벌 귀족의 대립, 그리고 국제 정세 속 고려의 위상까지 엿볼 수 있는 사건입니다.
1. 시대 배경 – 고려, 외풍 속 내풍의 시기
1115년은 거란의 쇠퇴와 금나라의 부상이라는 동북아시아 지형 변화의 해입니다.
- 거란(요나라)은 쇠락하며 금(金, 여진족)의 압박을 받기 시작
- 금나라가 새롭게 건국되며, 고려를 비롯한 동북아 정세가 출렁임
- 고려는 여전히 요나라와 수교 중이었지만, 새 강국 금과의 관계 설정이 시급한 문제
이 와중에 고려 조정 내부는 문벌 귀족의 세력 다툼이 극심했고,
특히 이자겸은 왕실과 혼인하여 외척이 되었고, 인종의 외삼촌이자 권력의 실세로 군림하고 있었습니다.
2. 이자겸은 누구인가?
이자겸은 고려 중기의 대표 문벌 귀족으로, 삼대에 걸쳐 왕실과 혼인한 외척 가문의 수장입니다.
그는 단순한 권신이 아니라, 국정을 좌지우지하며 사실상의 ‘섭정’처럼 군림했습니다.
- 인종의 외삼촌으로, 그를 즉위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
- 자신의 두 딸을 인종의 왕비로 들여보내며 권력 강화
- 반대 세력(척준경, 김부식 등)과 끊임없는 권력 투쟁
이처럼 이자겸은 왕권을 넘볼 정도로 권세가 막강했으며, 그런 그가 노린 것은 단지 국내 정치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외교마저 자신이 주도하려는 시도를 감행합니다.
3. 금 사신 회유 사건의 전개
금나라는 1115년 건국된 후, 곧바로 고려에 외교 관계 수립을 요청했습니다.
이에 따라 금나라 사신이 고려에 도착, 국서를 전하고 외교적 논의를 진행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이자겸이 금나라 사신을 은밀히 접촉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 공식적인 조정 회담과 별개로, 개인적으로 금 사신과 접촉
- 자신의 권력을 유지·강화하기 위한 조건을 제시
- 금과 우호 관계를 앞세워 인종과 조정 내 반대파를 견제하려는 의도
사실상 공식 외교를 뛰어넘은 사적 외교 시도, 즉 **‘이중 외교’**였으며, 이는 조정 질서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일이었습니다.
4. 왜 이자겸은 이런 위험한 선택을 했을까?
이자겸은 단순히 야망가가 아니라, 정세를 냉철히 분석하는 전략가였습니다.
- 요나라의 몰락이 임박함을 간파
- 금과의 조기 수교는 외교적 주도권 확보의 열쇠
- 자신이 주도해 금과의 관계를 맺으면, 조정에서 독보적 위치 확보 가능
- 왕 인종의 외교 노선을 무력화하고, 정국 주도권을 자신에게 집중
즉, 금 사신 회유는 단지 권력 유지가 아니라, 외교를 통한 정국 장악 플랜이었습니다.
5. 결과 – 조정의 반발과 이자겸의 몰락 시작
하지만 이자겸의 이중 외교 시도는 결국 폭로되고,
그의 정치적 위상에도 큰 타격을 입히게 됩니다.
- 조정 내 반대파(특히 척준경, 김부식 등)의 격렬한 비판
- 금나라에 대한 고려의 입장이 혼란스러워지며 외교적 위신 하락
- 인종 또한 이자겸을 신뢰하지 않게 됨
이 사건은 이자겸의 몰락의 전초가 되었고,
이듬해 벌어진 **이자겸의 난(1126년)**으로 이어지는 결정적 계기가 됩니다.
6. 이 사건이 보여주는 고려 정치의 민낯
이자겸의 금 사신 회유 사건은 단지 한 정치인의 야망이 아니라,
당시 고려 정치의 본질을 꿰뚫는 단면입니다.
- 왕보다 강한 외척, 문벌 귀족 중심 체제의 모순
- 외교가 국가의 통일된 목소리가 아닌, 정치 세력의 도구로 이용됨
- 외세와의 관계 설정이, 국가 전략이 아닌 개인 권력의 수단
이러한 구조는 이후 무신정변(1170)으로 이어지는 정치 불신과 내전의 서막이 되기도 합니다.
마무리 – 외교는 누구의 것인가?
이자겸은 실패한 권신이자, 고려 정치사의 문제적 인물로 평가받습니다.
그러나 그가 보여준 외교의 사유화, 권력 집중, 외척 정치의 폐해는
오늘날에도 중요한 질문을 던져줍니다.
- 외교는 특정 집단의 것이 아니라, 국가 전체의 합의여야 하며
- 권력이 사유화되면 외부의 위협보다 내부의 분열이 더 무섭다
이자겸의 금 사신 회유 사건,
그것은 고려 정치가 겉은 화려했지만 속은 균열로 가득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균열이 깊어질수록, 고려는 점점 흔들리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