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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천도를 둘러싼 고려의 내전

평양 천도를 둘러싼 고려의 내전

 

묘청의 서경천도운동과 그 좌절 (1135년)

 

고려 인종 13년(1135년), 평양에서는 역사적으로 매우 의미심장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바로 승려이자 정치가인 **묘청(妙淸)**이 중심이 되어 **서경(西京, 지금의 평양)**으로 수도를 옮기자는 천도 운동을 일으키고, 나아가 반란을 일으킨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단지 정치적 반란이 아니라, 고려 전기 사상·문화의 중심축이었던 ‘도읍, 사상, 외교, 이념’의 대격돌이었으며,
그 결과는 오늘날까지도 많은 의미를 남기고 있습니다.

 

 

평양 천도를 둘러싼 고려의 내전

 

 


1. 시대적 배경 – 고려 정치의 분열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이 일어난 시점은 인종(재위 1122~1146년) 때였습니다.
당시 고려는 문벌 귀족 중심의 정권이 장악하고 있었고, 수도 **개경(開京)**은 정치와 권력의 중심지였습니다.

하지만 점차 중앙 정계에 대한 비판과 개혁 목소리가 커졌습니다.

  • 귀족 중심 체제에 대한 지방 지식인들의 불만
  • 불교, 풍수지리, 도참신앙 등이 혼합된 새로운 정치이념의 등장
  • 고려 왕조의 정통성 강화와 외세(거란·금)에 대한 자주 외교 요구

이런 흐름 속에서 등장한 인물이 바로 묘청입니다.

 

 


2. 묘청은 누구인가?

 

묘청은 승려 출신이었지만, 단순한 종교인이 아니라 정치적 이상과 민족 자주 정신을 가진 지식인이었습니다.
그는 **서경(평양)**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다음과 같은 주장들을 펼쳤습니다.

  • 서경은 고구려의 옛 수도, 민족 정통성과 연계됨
  • 풍수지리상 개경은 쇠락하고, 서경이 새로운 도읍지로 적합
  • 금나라와의 사대 외교는 수치이며, 자주적 외교가 필요
  • 국풍(國風) 진흥 – 토착적 문화와 민족 중심 이념 강조

묘청은 서경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정치 질서를 꿈꾸며, 중앙의 권문세족과 정면으로 대립합니다.

 

 


3. 서경천도운동의 전개

 

1135년, 묘청은 드디어 행동에 나섭니다.

  • 서경에 천도 추진을 요구
  • 개경파 김부식 등 문신 세력이 반대
  • 결국 묘청은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켜 스스로 정권 수립
  • 국호를 **대위국(大爲國)**이라 하고, 연호를 천개(天開)라 함

이는 고려 왕조에 대한 명백한 반란 행위였고, 묘청은 자신을 중심으로 새로운 정통성을 세우려 한 것이었습니다.
그의 주장은 “우리는 고구려의 계승자이며, 금나라의 오랑캐와는 맞서 싸워야 한다”는 자주 민족주의 성향이 강했습니다.

 

 


4. 김부식과 개경파의 반격

 

묘청의 반란은 고려 조정에 큰 충격을 주었고, 인종은 즉시 진압에 나섭니다.
그 중심에는 당대 대표적 유학자 **김부식(金富軾)**이 있었습니다.

  • 김부식은 성리학적 질서와 왕도 정치를 중시
  • 서경천도와 도참·풍수 중심 사상에 반대
  • 금과의 외교는 필요하며, 현실적 선택이라는 입장

결국 김부식은 군대를 이끌고 서경으로 진격했고, 1년 만에 묘청의 정권은 붕괴됩니다.
묘청은 최후를 맞고, 대위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됩니다.

 

 


5. 사건의 평가 – 반란인가, 개혁운동인가?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은 그 결과만 보면 실패한 반란이지만,
그 안에는 다음과 같은 역사적 논점이 숨어 있습니다.

평가 관점내용
정치적 개경 중심 귀족 정치에 대한 개혁 시도
사상적 불교+풍수+도참 vs 유교 중심의 문치주의
외교적 금나라 사대 외교 vs 자주적 북벌 주장
문화적 국풍(토착문화) 진흥 vs 중국적 질서 수용
 

이처럼 단순한 반란이 아니라 사상과 문화, 지역과 중앙, 외교와 내정의 총체적 충돌이었습니다.

 

 


6. 묘청과 김부식 – 사상의 대립

 

  • 묘청은 고대 고구려의 계승과 자주 외교, 불교·풍수 중심의 민족주의 성향
  • 김부식은 유교적 문치주의, 질서와 안정, 현실주의 외교

두 사람의 충돌은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역사 인식의 갈등으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근현대 역사학자 신채호는 묘청을 두고 이렇게 평했습니다.

“조선 천년 역사상 제일의 대사건이며, 이 싸움은 곧 유교와 불교의 싸움이요, 사대주의와 자주주의의 싸움이며, 현실주의와 이상주의의 싸움이다.”
– 신채호, 「조선사연구초」



마무리 – 실패한 이상, 그러나 영원한 질문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은 결과적으로는 실패했지만,
그가 던진 질문은 오늘날에도 유효합니다.

  • 수도의 위치는 정치적 상징성을 담는다
  • 외교는 자주를 기반으로 할 것인가, 현실을 따를 것인가
  • 중앙과 지방, 전통과 개혁, 사대와 자주… 그 균형은 무엇인가

묘청은 사라졌지만, 그의 사상과 시도는 우리 역사 속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질문 중 하나로 남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