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왕조 최대의 위기
공민왕의 복주 피난과 홍건적의 침입 (1359, 1361년)
고려 말, 나라는 안팎으로 깊은 혼란 속에 있었습니다.
몽골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개혁을 추진하던 **공민왕(재위 1351~1374)**은 한편으로는 외세의 침입, 내부 반란, 권문세족의 반발이라는 삼중고를 겪고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충격적이면서도 왕권의 한계를 보여준 사건이 바로 홍건적의 고려 침입이며,
왕이 수도를 버리고 **복주(안동)**로 피난했던 비극적인 역사로 남아 있습니다.
1. 시대적 배경 – 원명 교체기, 동아시아의 격랑
14세기 중반은 몽골 제국(원)의 쇠퇴기로, 중국 대륙 내부는 극심한 혼란을 겪고 있었습니다.
- 원나라의 실정과 자연재해로 농민 반란 급증
- 그 중 가장 강력했던 반란군이 바로 홍건적(紅巾賊)
- 홍건적은 종교적 색채(백련교)를 가진 대규모 민란 세력
-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 세력도 이 홍건적에서 출발
홍건적은 중국 각지를 휩쓸며 세력을 확장했고, 급기야 국경을 넘어 고려까지 침입하게 됩니다.
고려는 이미 몽골과의 전쟁, 그리고 이후 개혁정책에 따른 권문세족 반발로 매우 불안한 상황이었기에, 그 피해는 더욱 컸습니다.
2. 제1차 홍건적의 침입 (1359년)
1359년, 첫 번째 침입이 시작됩니다.
- 홍건적 약 4만 명이 평안도 지역을 통해 침입
- 국경 방어가 허술했던 탓에 황해도까지 접근
- 다행히 이성계, 최영 등 고려 장수들의 활약으로 물리침
- 하지만, 이 침입으로 국가 방비체계의 취약함이 드러남
공민왕은 이후 군제 정비와 북방 방어 강화를 추진하지만,
2년 뒤 더 큰 위기가 닥칩니다.
3. 제2차 홍건적의 침입 (1361년) – 개경 함락
1361년, 홍건적은 다시 침입했으며, 이번엔 훨씬 대규모였습니다.
- 약 20만 대군이 고려 북부를 침공
- 고려군은 패주하고, 홍건적은 수도 개경을 점령
- 고려의 왕궁은 유린되고, 궁궐에 불이 붙으며 개경은 초토화
- 공민왕은 왕비 노국대장공주와 함께 도망, 결국 **복주(안동)**로 피신
왕이 수도를 버리고 피난을 떠나는 사태는 고려사상 유례없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만큼 국가의 통치체계가 붕괴 직전이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4. 복주 피난 – 공민왕의 절망과 인내
공민왕은 수라 같은 상황 속에서 충신들과 함께 복주로 피난했고,
그곳에서 국정을 간신히 이어갑니다.
- 당시 공민왕의 근신 중에는 신돈, 정몽주, 최영, 이성계 등이 있음
- 복주행궁을 설치하고 정사를 계속 집행
- 백성들은 왕의 피난에 분노하면서도, 생존을 위해 각지로 흩어짐
- 민심은 무너졌고, 왕조의 권위는 크게 추락
이 시기 공민왕은 극도의 외로움과 분노, 무력감에 휩싸여 있었고,
홍건적에게 유린당한 개경으로의 복귀를 위한 마지막 결단을 준비합니다.
5. 개경 탈환 – 반격의 서막
다행히 홍건적은 고려 전역을 지배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 약탈이 목적이었던 그들은 식량과 보급 문제로 개경에서 이탈
- 이 틈을 타 이성계, 최영 등의 고려 명장들이 개경 탈환 작전 전개
- 결국 1362년, 개경 수복 성공, 공민왕이 환도함
하지만 궁궐은 불타 있었고, 백성들의 삶은 파괴되어 있었으며,
왕조의 존립 자체가 위태로운 상황은 계속됩니다.
6. 역사적 의미 – 왕권의 한계와 고려 후기의 위기
공민왕의 복주 피난 사건은 단지 한 왕의 도피가 아닙니다.
그것은 고려 중앙집권 체제의 붕괴, 무력한 왕권,
그리고 외침 앞에 무방비였던 현실을 여실히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또한 이 사건은 다음과 같은 중요한 역사 흐름을 예고합니다.
정치 | 무신세력(이성계 등)의 부상 → 조선 건국 준비 |
외교 | 명나라와의 관계 설정 필요성 증가 |
사회 | 백성들의 피폐화, 민심 이반, 반봉건 움직임 증가 |
사상 | 불교 중심의 정치 이념 약화 → 성리학 강화의 기반 |
7. 공민왕의 고뇌 – 개혁 군주, 그러나 고독한 개혁자
공민왕은 몽골의 영향력을 배제하고 개혁을 추진한 개혁 군주였지만,
홍건적의 침입은 그를 심리적으로도 무너뜨렸습니다.
- 왕비 노국공주가 병으로 사망 → 정신적 충격
- 이후 신돈에 의존하며 왕권 회복 시도, 그러나 실패
- 결국 공민왕은 암살당함(1374) → 왕조는 더욱 혼란에 빠짐
공민왕의 복주 피난은 한 시대의 개혁이 좌절되고, 한 왕이 고립되어 무너지는 장면이었습니다.
마무리 – 왕이 피난을 떠난 나라
1361년, 왕이 수도를 버리고 달아났다는 것은
더 이상 나라가 나라로서 기능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이성계, 최영, 정몽주와 같은 인물들이 나라를 되살리고자 헌신했기에
결국 고려는 다시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홍건적의 침입과 복주 피난, 그것은
고려 말, 나라의 위기와 재편을 상징하는 사건이자,
곧 다가올 조선 개국의 서막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