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예종의 국자감 정비와 유학 진흥 정책
12세기 초, 교육과 사상의 르네상스를 꿈꾸다
고려의 제16대 왕 **예종(睿宗, 재위 1105~1122)**은 정치적 안정을 기반으로 학문과 문화의 진흥에 힘쓴 군주였습니다.
특히, 그가 남긴 교육 개혁 중 하나인 국자감(國子監)의 정비와 유학 진흥 정책은 오늘날 기준으로 보면 고려의 ‘국립대학교 개혁’이라 할 수 있는 획기적인 시도였습니다.
하지만 무신정변이나 이자겸의 난 등 격동의 사건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이 시기의 교육 정책은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고려 예종이 추진한 국자감 정비와 유학 장려의 배경, 내용, 의미를 자세히 들여다보고자 합니다.
1. 시대적 배경 – 사상의 전환점에 선 고려
고려는 건국 초부터 불교를 국교로 삼고 왕권과 불교가 밀접하게 연결된 나라였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유교적 질서와 교육의 필요성이 점차 강조되었고,
고려 문벌 귀족들은 유교적 교양을 가진 지식인 관료로 자리 잡게 됩니다.
예종이 즉위하던 12세기 초는 고려 내부적으로도 사상의 전환점이 찾아오던 시기였습니다.
- 외교적으로는 송나라와의 문물 교류가 활발해짐
- 문벌 귀족 체제가 안정되며 ‘학문’에 대한 욕구가 커짐
- 중앙집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관료 육성 체계 필요성 증가
- 유교를 통해 통치 이념을 정비하려는 흐름
이런 배경 속에서 예종은 국가 주도의 교육 기관 개편에 나서게 됩니다.
2. 국자감이란 무엇인가?
국자감은 고려 시대 최고의 국립 교육기관입니다.
- 태조 왕건 때 처음 설치됨 (당나라 제도 모방)
- 고려 중앙 귀족 자제들이 입학하여 유교 경전과 문학을 공부
- 문과, 음서 출신 관료들에게 학문을 가르쳐 정치 엘리트로 양성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국자감은 점차 형식적 기관으로 전락하고 있었고,
교육의 질은 떨어졌으며 관리는 허술했습니다.
예종은 이 상황을 타개하고자 대대적인 개편 작업을 단행합니다.
3. 예종의 국자감 정비 – 구체적 내용
① 7재(七齋) 교육 과정 도입
가장 주목할 개혁은 바로 7재 과정의 도입입니다.
- 7재란 유학 중심의 7가지 교육 과정
- 경학재(經學齋): 유교 경전 교육
- 서학재(書學齋): 서예
- 산학재(算學齋): 산수
- 율학재(律學齋): 율령 및 법제
- 명심재(明心齋): 수양 및 철학
- 잡학재(雜學齋): 백과적 지식
- 무학재(武學齋): 무예
이러한 체계적인 교육 과정은 고려 이전에 없었던 시도로,
단순히 경전만 가르치던 유학 교육을 입체적이고 실용적인 방향으로 확장시킨 것이 특징입니다.
② 강예재 설치
학문과 무예를 함께 교육하는 ‘강예재’를 신설하여,
문무 양면에서 관료를 양성하려 했습니다.
이는 이후 조선시대의 무과나 병학 교육의 시초라 볼 수 있습니다.
③ 장학재단 설립 – 양현고(養賢庫)
교육을 지속하기 위한 재정 기반으로,
장학기금 형태의 양현고를 설치했습니다.
- 양현고는 학자들에게 장학금 지급을 위한 기관
- 고려 최초의 장학 재단이라 할 수 있음
- 학생들이 경제적 부담 없이 학업에 전념하도록 설계
④ 유학생 파견 및 도서 수입
- 송나라에 유학생을 파견해 신학문 수용
- 송나라 책을 대량으로 수입, 국자감에 비치
- 고려 내 문풍(文風) 고양과 국제 지식 네트워크 확장 시도
4. 유학 장려 정책과 그 성과
예종은 국자감의 개편과 함께 유학 장려 정책도 병행했습니다.
- 과거제도의 운영을 강화
- 성균관과 국자감 중심으로 학사제도 정비
- 유학 학자들을 우대하고 유학 중심의 관료 등용 확대
그 결과, 예종 이후 유학이 고려 지배 이념의 중심으로 자리잡게 되었고,
후속 왕들인 인종, 의종 시기까지 유학적 정치 질서가 뿌리내릴 수 있었습니다.
5. 역사적 의미 – 고려 르네상스의 기반
예종의 국자감 정비는 단지 교육기관 개편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곧 고려 문벌귀족 사회의 문명화, 엘리트 양성, 정치 이념의 체계화로 이어지는
정치·문화적 르네상스의 서막이었습니다.
| 교육 | 고려 최초의 정규 교육과정 도입 (7재) |
| 제도 | 장학재단(양현고) 설치, 유학자 우대 |
| 정치 | 유학 기반 관료제 강화 |
| 문화 | 송나라 문물 유입 → 고려 학문·문화 융성 |
이러한 기반은 훗날 조선 건국 후 성리학 중심 사회로의 이행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6. 왜 잘 알려지지 않았을까?
예종의 교육 개혁은 그 내용과 시도 면에서 결코 가볍지 않지만,
그의 통치기는 이후 이자겸의 난, 묘청의 서경천도운동,
그리고 무신정변으로 이어지는 사회 불안기 직전에 해당되기에 상대적으로 주목을 덜 받았습니다.
또한 실제적인 개혁이 무신정권기에 와서 지속되지 못한 점도
그의 교육 정책이 역사적 조명을 받지 못한 원인이 되었습니다.
마무리 – 예종의 조용한 개혁
예종은 뛰어난 무장도 아니었고, 드라마틱한 외교사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조용히, 그러나 철저하게 고려의 교육과 문화적 기반을 다진 군주였습니다.
그가 개혁한 국자감과 유학 장려 정책은
“왕도 정치”라는 유교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첫걸음이었으며,
고려가 ‘사대부 중심 유교 국가’로 발전하는 전환점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를 다시 평가해야 합니다.
예종은 단지 지나간 왕이 아니라,
고려 르네상스를 설계한 교육 개혁가였습니다.